스포주의
음식, 사랑, 영화가 황홀해지려면 필요한 것. ‘시간’을 요리하는 탁월함으로
-김소미 평론
나는 그다지 줏대가 있는 편이 아니다. 팔랑귀라고나 할까나.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딱히 냉철한 분석이나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보지도 않는다. 그저 감독이 차려준 미장셴과 감정을 오마카세 마냥 받아먹고 느끼는 편이다. 한때는 영화 평론에 꽤 진지하게 임했던 적도 있지만, 나의 성향을 깨달은 이후로는 평론에 대한 뜻을 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은 다 마신 커피잔에 남아있는 가루 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쓴다.
최근에는 왓차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를 열심히 보고 있다. 다들 리틀 포레스트 감성으로 생각하고 들어와 펑펑 운다는데, 나도 똑같은 루트를 밟고 있다. 이제 절반즈음 보았는데, 잔잔한 요리를 다루는 감성은 너무 맘에 들지만, 무거운 스토리가 부담스러워 다른 영화를 찾아보던 도중 넷플릭스의 프렌치 수프를 발견하고 주저없이 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뿔싸, 똑같은 내용일 줄이야. 그저 세계관과 주인공의 상황만 조금 다를 뿐, 여기도 여주인공이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도뎅과 외제니는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레스토랑의 오너와 쉐프의 관계이자,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실혼 관계는 우리나라의 시선에서는 꽤나 독특하게 보여진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며, 때에 따라 정중히 섹스를 청하고 꾸준히 결혼을 요청하는 남자와, 이따끔 잠자리를 응하지만 결혼은 20년동안 거절해온 여자의 마음을 단번에 알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 영화 초, 중반부까지는 도뎅의 사회적인 위치와 시대상을 고려하였을 때, 외제니가 진짜 도뎅을 사랑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갑과 을이 명확한 위치에서 사랑은 대개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영화를 볼수록 도뎅의 마음에서 진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런 남자라면, 조심스럽고 위험한 사랑일지라도, 가치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그의 대사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난 모든 계절이 좋아요. 차가운 첫 빗방울, 첫 눈송이, 벽난로의 첫장작불, 첫 새순, 그렇게 매년 돌아오는 첫 사건이 절 기쁘게 해요.
도뎅의 모습을 보며 늙는 것이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그 어떤 청년보다도 순수하고 정열적이로 외제니를 사랑하지만, 삶에서의 노련미와 여유로움이 보이는 그의 원숙함은 마치 이상적인 '아저씨' 처럼 보여진다.
극의 중반부에서 그렇게 두 사람은 약혼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초중반부 내내 외제니의 건강상태에 대한 적신호가 보여지는데, 혹시나 했는데, 감독은 그렇게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고 그녀를 죽여버린다.
나는 클리셰를 국밥이라고 생각한다. 클리셰에 변주를 주거나 아예 이를 빗겨나가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영화들도 물론 있지만, 클리셰는 많은 문학과 극작품에서 사랑받았기 때문에 클리셰로 분류되기 마련이다.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간다고 해서 그 영화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클리셰를 어떻게 끓여내냐 이다. 프렌치 수프에서 감독은 클리셰를 피하려는 생각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원작이 있는 영화인데, 원작을 보지 않아 스토리에서 얼만큼의 변형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조금은 진부하게도 보여진다.
하지만 진부한 스토리를 정성스레 포장하는 것은 바로 미쟝센과 연출이다. 1880년대 프랑스의 분위기와 오뜨 퀴진을 잘 살렸다. 흔한 OST 하나 없이, 마치 자연광 밑에 있는 것처럼 낮은 따뜻하고 환하고, 밤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모습이 그대로 담아진다. 의복과 저택, 배경이 모두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캡쳐가 되지 않아 너무 아쉽다).
영화는 나름의 여성주의를 담아보고자 한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 외제니가 도뎅에게 스스로를 아내로 생각하는지, 요리사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도뎅은 그녀를 요리사로 바라본다고 답변하고 영화를 막을 내린다. 나는 이 멘트가 무슨 뜻일까 고민하던 도중, 여성이 직업을 갖기 어려운 1880년대, 그녀를 주체적인 여성으로 봐라봐주었다는 해석을 보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전형적인 남녀관계에서 그 이상의 여성주의를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사랑과 요리를 기교없이 뭉근히 우린 포토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