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4.11.10] 24년에 김치를 담가먹는다는 것은.

[돼지로그] 먹고 또 먹고

by Life WHE 2024. 11. 10. 20:54

본문

오늘은 김장을 했다. 매해 하는 우리 집의 빅 이벤트 중 하나다. 

네 가족이 모여 다같이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근다. 이럴때 마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각자 백키로 남짓한 거리를 모여 2박 3일에 걸쳐 만들어내는 "김치". 

 

20대 초반에 자취를 처음 시작할 때 부터 나는 한식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일 배달음식과 파스타로 점철된 삶을 살아도 그져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본가에 들어와 매일 집밥을 먹을때는 어머니의 맛있는 식사 마져도 때떄론 질리는 순간이 왔다. 그럴때 마다 나는 '역시 나는 한식파가 아니야'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하늘에서 계시가 온 것 같이, 한식이 땡기던 순간들이 나에게 찾아왔다. 처음은 프라하의 비오는 날, 국물이 땡기던 저녁. 그리곤 홍콩에서 2% 부족한 아시안을 먹으면서 느꼈던 결핍, 그리고 하이드 파크 옆에서 파스타를 먹던 그 순간. 

 

어쩌면 영화속, 본인이 슈퍼히어로가 아니길 바라며 정체성을 부정하던 주인공이 벗어날 수 없는 능력임을 깨닫는 것 처럼, 나는 이곳에서 살아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해외의 어딘가에서 항상 따뜻한 밥과 김치는 머릿속을 덮고 나의 주제를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장은 정말로 고되다. 비록 나는 오늘 새벽 6시 반부터 일어나 반나절 동안의 노동이였다고 하지만, 사실 그 시작을 찾아가다보면 배추를 절이는 것, 그리고 그 전에는 아직 쌀쌀했던 봄날의 아침에 밭에 나가 배추를 심는 것 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그래서 김치는 사먹어야 한다. 어렸을 때 부터 참석한 김장은 올해로 어림잡아 10년쯤 됐을 것이다. 10년 전에는 요맘때 김장을 200포기 가까이 하고, 김장김치를 다 먹으면 봄에 모여 봄김장을 한번 더 했었는데, 24년에 우리는 60포기에서 타협을 보았다. 아마 벚꽃이 피기 전에 김장김치는 바닥을 보일꺼고, 그 뒤로는 종갓집과 비비고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장을 한다는 건 나의 일년 중 꽤나 중요한 순간이다. 모두가 각자 쪼개져 휴대폰 쪼가리로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만, 김치는 쌀쌀한 요맘때 서로의 얼굴을 보게 해주는 좋은 핑계가 되어준다. 손이 빨개지고, 발이 꽁꽁 얼어가며 배춧잎 사이사이로 양념을 버무리길 반복하고 점심이 되면, 따뜻한 수육과 김치가 식탁에서 우리를 반겨준다. 그 순간 식탁 위의 김치는 그저 김치가 아니다. 오늘의 노동에 대한 아주 작은 댓가이자, 모두가 건강한 한해를 잘 보냈음을 눈으로 확인해주는 좋은 핑계이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대한민국 어딘가에 태어났다는 아주 빨갛고 매콤한 증거이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한번쯤은, 그런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사람의 안녕을 확인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한번 더 확인하는 그런 순간. 김치를 사먹다보면 그런 순간들은 너무 쉽게 망각된다. 식탁 위에서 김치는 조금 더, 대접 받을 필요가 있는데도 말이다. 

 

수육과 김치.

728x90

관련글 더보기